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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王羲之故宅 (목요일,첫째날) 첨부파일(1)
2016-08-28
일시:2016年8月11日(목요일) (첫째날)
장소:王羲之故宅
왕희지는 우리나이로 59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고문서에 실려있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고 문서마다 활동 연대가 조금씩 달라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도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히 여겨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에서왕희지의 글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히 서예가들에게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 받는 인물이 왕희지(王羲之)이다.
王羲之 蘭亭序 앞에서 인증샷
영화 9년 저문 봄 삼월 초, 우리들 수계하러 회계 땅 산음 난정에 모였거니,
그 속엔 뭇 현인이 망라되었고 노소가 없었다.
거기엔 고산준령이 둘렀고 무성한 수풀, 훤칠한 대,
거기다 맑은 물비단 여울이 좌우를 번쩍이며 휘감았다.
굽이굽이 물고랑을 파고 거기다 술잔을 띄운 뒤
물 따라 흘러오는 술잔을 차례대로 마시노라면,
비록 피리·젓대·금슬의 풍악이 없더라도
한 잔 마시고 한 수 읊는 동안 흥이 솟구치고 퍼지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이날따라 맑은 하늘에 훈훈한 바람, 머리를 추켜 아득히 우주의 망망함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을 살피노라면, 눈에 닿는 풍경과 가슴에 닿는 회포로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난만한 열락에 잠긴다.
인간은 현실에 나와 한평생을 부앙 속에서 보낸다.
어떤이는 친구를 불러 그 포부를 방안에서 털어놓고,
어떤 이는 마음 붙일 곳 찾아 육체 밖에서 먼 방랑을 떠난다.
비록 사람마다 지취가 다르고 그 동정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이 잠시 뜻을 얻었을 때엔 자기만족에 취할 뿐
만년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시들할 때 마음은 사물의 변화를 따라 식으면서 슬픔이 뒤따른다.
아까 짜릿했던 기쁨이 어느새 거품이 되어 사라지면, 그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거늘,
하물며 목숨을 길게 누리거나 짧게 꺾이는 일은 오직 자연에 맡길 뿐,
그냥 생명의 마지막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다.
옛말에 살고 죽는 일이란 대사라 했거늘, 어찌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까?
매양 고인들의 감개를 읽을 때마다 우리 또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나니,
그들의 글에 탄성을 연발하는 동안 저절로 죽음을 깨닫는다.
분명 삶과 죽음은 허망한 몸짓, 팽조처럼 팔백 년을 장수하는 것도,
어린 소년이 요절하는 것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과거를 돌아보아도 고인이 보이지 않듯 먼 뒷날 현재를 아무리 뒤돌아보아도
지금 사람은 보이지 않을지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의 시를 적는다.
비록 사람마다 경우는 다를지라도 그 슬픈 까닭은 같을지니,
뒷날 누가 있어 이를 읽거든 장차 무언가 느낄지어다.
王羲之는 글씨를 다 쓰고 자신의 문앞에 있는 연못에
오랜 세월을 붓을 씻다보니 맑았던 연못이
검은 먹물로 변해 버렸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후에 사람들은 이 연못을 洗硯池라고 불렀답니다.
중국동진의 중국고금의 첫째가는 서성으로 존경받는 왕희지
양 무제나 당 태종이나 왜 왕희지의 글자를 수집해서 소중히 여기게 되었는지 알만 합니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
그는 한(漢)나라 때 시작 된 해서(楷)·행서(行)·초서(草)의
실용적인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킨 인물이다.
당(唐)나라 때 서예에 뛰어났던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하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희지는 우리나이로 59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고문서에 실려있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고 문서마다 활동 연대가 조금씩 달라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도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히 여겨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에서왕희지의 글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히 서예가들에게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 받는 인물이 왕희지(王羲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