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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3 09:02 - 2015 임간수업을 다녀와서 -
휴식과 배움이 있는 즐거운 임간수업
학정 25기 이두경
여름이 되면 답답한 강의실을 벗어나 지방에 있는 書院을 찾아가서 수업을 하는 한림원의 전통이 있다. 이를 이름하여 林間修業이라 한다. 한문학을 처음 접하는 원생들에게 서원의 분위기를 조금이나 체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는 대구 屛巖書院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각 학년의 원생들이 출발지로 왔다. 서로 지인을 찾아 인사를 하고 여기 저기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얼굴에는 들뜬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해에 나도 서원에서 수업을 받는다는 색다른 경험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버스에 올랐던 기억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올해 처음 임간수업에 참여하는 분들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기며 지정된 차에 올랐다.
얼마 후 서울을 벗어나자 달리는 차창 밖은 초록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 굽이치는 푸른 산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마음을 몽땅 빼앗겨버리고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차에서 집행부가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어 다소 허기를 면하고 휴게소에 내리니 휴게소의 햇볕은 쇠를 녹일 듯한 불볕이었다. 한참을 달린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병암서원은 대구 시내에서 가깝고 건립한 햇수도 오래지 않아 정읍 武城書院에서 느꼈던 古色蒼然한 情趣는 없었다. 그러나 근래에 세운 서원 중 그 규모가 작지 않으며 무엇보다 서원의 운영을 잘 하고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여장을 풀고, 먼저 사당에 고유례를 올렸다. 집행부가 준비한 祝文도 읽었다 사당에는 星州都氏의 선조 몇 분을 배향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의식은 아마도 남의 집을 찾아가면 그 집의 웃어른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는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사당 주변에는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나무가 손짓하며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그 후 각 학년별로 배정된 공간에서 수업을 받았다. 서울의 강의실에서만큼 편한 자세를 취할 수는 없었지만, 한옥이 주는 정취가 매우 인상 깊었다. 마당 한켠에 자리한 석류나무가 나를 손짓하는 듯, 장지문을 열면 바깥 공간과 안채가 이어지고, 너른 마당이 시야로 들어오는 탁트인 한옥의 여유로움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수업 중간에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기도 하고, 편한 자세로 나무기둥에 기대어 정담을 나누었다. 어스름 날이 저물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옥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그 소리가 한옥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저녁에는 한림원 전체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고, 친목을 다지는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첫째 날을 보냈다.
둘째 날이 밝았다. 임간수업기간에는 아침 일찍 聲讀수업을 진행한다. 교수님의 지도아래 경전을 소리 내어 함께 읽다 보면, 마음에 와 닿는 글귀가 있다. 눈으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내용은 마음에 울림으로 전해온다. 성독에 참여했던 어떤 분은 임간수업 때 처음 성독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성독을 통해서 문장에 담긴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받아들일 수 있으니, 모두들 성독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 같다. 이날 학정계제 2학년은 서원 뒤켠에 있는 옛 서당건물에서 한시 수업을 받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시를 주제로 옛 서당건물에서 서안을 마주하고 수업을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비가 마치 주렴을 드리운 것 같았고, 푸른 잎새에 맺힌 빗방울과 촉촉히 젖은 꽃잎이 詩興을 자아내게 하였다.
한시 수업 후에는 이윤영 박사님의 특강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불교와 유학을 공부하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신 분이었다. 현대 심리학과 불교와 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심성에 대한 강의였다. 사회가 발달하고 지식정보가 쌓일수록 전문분야로 학문의 갈래가 나뉘어졌지만, 결국 학문의 경계는 없는 것 같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연결고리를 찾아서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학문연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저녁 식사 후, 조촐하게 학년별로 모임이 있었다. 우리 학년은 가장 막내격인 K씨가 제안한 놀이로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술잔을 기울이며 忘年之友의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셋째 날은 임간수업의 마지막 날이다. 밤새 비가 내린 뒤 개인 하늘이 맑았다. 일정에 따라 두 번째 聲讀수업도 무사히 마쳤다. 싱그러운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셨다. 아침식사 후 일부 학생들은 일정을 다소 변경하여 계명대에서 실시하고 있는 탁본전을 관람하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계명대로 향했다. 넓은 교정에는 시원스레 뻗은 수삼나무와 이국적인 건축물들이 눈을 놀라게 했다. 녹지공간이 잘 조성된 교정이라 새삼 느끼며 계명대 박물관을 찾아갔다. 우리 일행은 미리 예약된 박물관
관계자분의 설명을 들으며 유물들을 관람했다.
박물관에는 암각화에서 고대 신라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국보급 탁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대사회의 문헌기록이 적어서 고대사 연구에 금석문의 비중이 크다고 한다. 비문에는 문헌기록에 없는 많은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고 했다. 이번 전시 관람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많은 비문이 남겨져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금석문의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탁본전시 관람과 함께 선사 유물 전시도 함께 둘러보았다. 다른 박물관보다 선사유물에 대한 자세하고도 풍부한 유물전시가 인상 깊었다. 선사유물 외에도 많은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일행 중 다리가 불편해서 전시관 한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분도 계셨지만, 유물에 대한 설명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며, 유물 관람 대열에 다시 합류하여 설명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탁본표본 앞에서 서체를 감상하기도 하고, 그동안 학습했던 실력을 바탕삼아 아는 문장이 있는지 서로 확인해 보기도 하였다. 박물관 관람 이후 양반들의 가옥과 서당을 재연한 한학촌도 같이 둘러보았다. 정자(瑞雲停)앞 연못에 핀 연꽃이 선명한 빛깔을 띠며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통적인 분위기의 건물 뒤로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이 있으니 동서양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듯한 느낌이었다.
오전 관람을 마치고 오후에는 경북 안동에 있는 泗濱書院과 陶山書院을 관람하였다. 사빈서원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전통한옥이었다. 정갈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지닌 서원의 모습에서 옛 선비들의 절제된 모습과 품성을 느낄 수 있었다. 서원에 도착하자 관계자 몇 분이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유건에 전통한복을 입으신 어르신들의 기품 있는 모습이 다채로워 살짝 사진에 담아보았다.
이곳에서도 우리 일행은 사당에 올라가서 참배를 하고 서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사당에서 내려다보니, 동재와 관리사 앞으로 저 멀리 산자락이 보이고, 뒤로는 포근한 산세가 서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남은 여정을 위해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한국전통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 선생과 관련이 있는 서원이기에 이번 관람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天光雲影臺를 만났다. 朱子의 觀書有感이라는 시의 글귀를 인용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수업 때 배운 문구를 보니 반가웠다. 도산서원 앞에 펼쳐진 호수에는 시사단이 있었다. 시사단을 배경으로 백로가 물가에서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안동호의 정경은 평화로워 보였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믄 시야가 넓게 트인 정경을 보고 있자니, 눈이 밝아지고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심신수련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 앞에는 400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아름드리나무가 초록가지를 늘어뜨린 채 풍성하게 서있었고, 한켠에는 洌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도산서원 경내로 들어서니 역시 전통 한복차림의 퇴계 이황 후손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우리는 서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퇴계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尙德祠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알묘를 했다. 알묘를 행할 때, 드나드는 예법이 家風마다 다르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서원 곳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퇴계 선생이 살아생전 기거했던 도산서당은 한 칸 정도의 작은 방,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는 탁 트인 공간과 낮은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필요공간을 최소화해서 절제된 선비정신의 수양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산서당을 둘러본 어떤 분이 퇴계선생의 명성에 비해서 너무 소박하다고 한 말에 나는 劉禹錫의 <陋室銘>을 떠올려 보았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
孔子云, 何陋之有.
도산서당의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던 퇴계 선생의 검소한 성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퇴계 선생에 대해 공부하면서 성품이 어떠했는지 들어왔던 터라 이번 도산서원의 관람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를 주었다. 자신보다 나이어린 선비의 稚氣어린 주장과 질문에 정성껏 長文의 편지로 답신을 보냈다거나, 知的障礙가 있는 부인을 평생 사랑으로 보살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끊임없는 자기수양, 학문에 임하는 태도, 배움과 실천이 하나 되는 생활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도산서당 안에는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의 蒙泉이라는 샘이 있다. 《周易》의 蒙卦에서 의미를 따왔다고 한다. 맑은 샘 안에서 고개를 쏙 내미는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한 순간, 사자성어 ‘坐井觀天’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蒙泉에 사는 개구리가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양 여기지 말라고 은근히 훈계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보이는 것만이 앎의 전부이고, 보이는 범주 안에서 판단하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인 줄
알았다가 사회생활에 첫 발을 들여놓고, 경험하지 못한 일에 처했을 때 당황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그만 물고기가 호수와 강이 제일 넓은 물인 줄 알다가, 망망대해를 만났을 때 놀라는 것과
같고, 이름 없는 검객이 강호의 고수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물의 깊이가 깊을수록 소리가 없듯이, 배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깨달음도 커지는 것처럼, 얕은 배움을 가지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을 늘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산서원의 蒙泉에서 마주친 개구리 덕에 깨달음 하나를 더 얻고 갈 줄이야...
퇴계 선생의 자취와 정신이 깃든 도산서원을 나서며 안동호수의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버스에 올랐다. 서울로 향하는 우리 일행은 지친기색이 역력했지만 2박3일 동안 보고 느낀 소감을 이야기 하며, 임간수업의 아쉬움과 즐거움도 함께 안고 돌아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각 학년 서로간에 서먹함을 지우고, 친밀감을 높이는 시간이 적었다는 점이다. 연령과 직업군이 다양하지만, 배움에 뜻을 두고 모인 한림원 식구들이기에 忘年之友의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은 임간수업이 유일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각자의 바쁜 생활 가운데, 저녁시간에 강의실을 찾아 공부하다보면 늦은 시간에 귀가하느라, 서로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해는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름날의 초록빛 싱그러움과 함께한 휴식과 배움의 즐거움이 있는 임간수업이었다. 내년에는 어떤 임간수업이 될지, 또 각자 참여하는 분들은 어떤 깨달음을 갖게 될지 사뭇 궁금한 마음이 앞선다.